2013년 11월 25일 월요일

필리핀이 장충체육관 지어줬다는 것은 근거 없는 루머


장충체육관






장충체육관(奬忠體育館)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2가에 위치해 있으며, 원래 육군체육관으로 사용하던 것을 서울특별시에서 인수하여 본격적인 경기장으로 개·보수한 곳이다. 이 건물은 당시 서울특별시의 예산 5억 6,000여만 환(5,600만 원)을 자금으로 하여, 건축가 김정수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구조설계 및 건축설계는 건축가 최종완이 맡아 삼부토건이 건설한 대한민국 최초의 실내 경기장이다.[1][2][3][4]

1963년 2월 1일에 개장했고 서울특별시에서 관리하다가 2007년 2월 1일부터 동원엔터프라이즈에 위탁했다. [5]

배구, 농구, 종합격투기 등의 스포츠 경기와 콘서트, 마당놀이 등의 문화 공연이 열린다. 2009~2010 V-리그부터 프로 배구 구단인 여자 배구 GS칼텍스 서울 KIXX의 홈구장으로 사용된다.

1989년(13회)과 1992년(16회)에는 장충체육관에서 MBC 대학가요제가 개최되었다.

2012~2013 V-리그 종료 이후 내부 리모델링을 거쳐 2013년에 재개관할 예정이었지만 2014년으로 연기되었다. 리모델링과 함께 근처의 동대입구역 연결 통로가 개설될 예정이다.





주석

1.이동 ↑ 필리핀에서 자금지원을 받아 건설되었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출처도 불분명한 주장이다.
2.이동 ↑ 장충체육관 설계 및 시공자에 대한 오해 규명의 글[1]
3.이동 ↑ “<장충체육관 건축에 대한 오해, 정정보도-바로잡습니다->”, 《조선일보, DB조선》, 2005년 8월 19일 작성, p. 종합 A2면.
4.이동 ↑ “장충체육관, 우리 자금과 손으로 만든 `100% 국산`”, 《디지털타임스》, 2013년 5월 20일 작성.
5.이동 ↑ 서울특별시 체육시설관리사업소 장충체육관 소개






http://ko.wikipedia.org/wiki/%EC%9E%A5%EC%B6%A9%EC%B2%B4%EC%9C%A1%EA%B4%80

한국 제조업 경쟁력 세계 4위 - UN

"한국 제조업 경쟁력 세계 4위"<유엔산업개발기구>


| 기사입력 2013-11-21 06:02 | 최종수정 2013-11-21 09:57



일본 1위, 독일 2위, 미국 3위…중국 7위로 '껑충'

(서울=연합뉴스) 박진형 기자







한국의 제조업 경쟁력이 유엔 산하기구 조사 결과 일본·독일·미국에 이어 세계 4위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21일 동양증권에 따르면 유엔산업개발기구(UNIDO)가 2010년 지표를 기준으로 최근 집계·발표한 '2012∼2013년 세계 제조업 경쟁력 지수'에서 한국이 0.4044점으로 일본(0.5409점)·독일(0.5176점)·미국(0.4822점)에 이어 4위에 올랐다.

한국의 순위는 지난 1990년 14위에서 2000년 12위로 상승했다가 2005년부터 4위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은 2000년대 10년간 8계단 상승해 중국(23→7위·16계단 약진)에 이어 10위권 안에서 두 번째로 가장 빨리 순위를 끌어올렸다.

한편 상위 3개국이 첫 조사인 1990년 기준부터 계속 1∼3위를 나눠 가진 가운데 이번에는 대만, 싱가포르, 중국, 스위스, 벨기에, 프랑스가 5∼10위에 들었다.







<그래픽> 세계 제조업 경쟁력 순위 (서울=연합뉴스) 김토일 기자 = 21일 동양증권에 따르면 유엔산업개발기구(UNIDO)가 2010년 지표를 기준으로 최근 집계·발표한 '2012∼2013년 세계 제조업 경쟁력 지수'에서 한국이 0.4044점으로 일본(0.5409점)·독일(0.5176점)·미국(0.4822점)에 이어 4위에 올랐다. kmtoil@yna.co.kr @yonhap_graphics(트위터)















이 지수는 세계 제조업 부가가치 및 수출시장에서 각국별 비중, 1인당 제조업 부가가치 생산액 등 8가지 통계 지표를 가중평균하는 방식으로 산출된다.

설문조사 결과 등이 포함되는 세계경제포럼(WEF)·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 등 타 기관의 경쟁력 지수와 달리 계량화된 수치만을 근거로 잠재력이 아닌 실제 실적만을 평가한다는 차이가 있다.

세계 제조업 부가가치에서 한국의 비중은 1990년 1.4%(13위)에서 2000년 2.0%(8위), 2010년 3.2%(5위)로 꾸준히 늘었다.

세계 제조업 수출시장에서 한국 비중도 1990년 2.6%(10위)에서 2000년 3.4%(9위), 2010년 4.2%(6위)로 증가세를 타고 있다.

다만 1인당 제조업 부가가치 생산액은 4천783달러로 10위에 그쳐 1위 싱가포르(8천198달러), 2위 일본(7천994달러) 등과 여전히 큰 격차를 보였다.

이철희 동양증권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주요 7개국(G7) 등 서방 선진국들이 세계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순위나 비중은 정체되거나 낮아지고 있는 반면 한국과 중국의 순위나 비중은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국내총생산(GDP) 중 제조업 부가가치 비중 등 다른 지표를 보면 그간 선진국은 질적으로 성장했지만 양적으로는 축소됐고 중진국 등 신흥국은 양적으로는 성장했지만 질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다"며 "그러나 한국은 지난 20년간 양적·질적 성장을 모두 달성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미국의 제조업 부활에 필요한 산업재·소재를 수출할 수 있는 나라는 독일·일본·한국 등에 그칠 것이며 신흥국 제조업은 아직 그 수준이 못 된다"며 "선진국 제조업 부활이라는 새로운 환경 아래서도 여전히 한국 제조업은 강한 경쟁력으로 선진국 경기 회복의 혜택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jhpark@yna.co.kr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1&aid=0006608478

2013년 11월 24일 일요일

한국 1인당 GDP 7년째 2만달러대. 언제쯤 3만 달러 돌파할까.

7년째 국민소득 2만弗대…언제 3만弗 도달하나



기사입력 2013-11-25 06:09

최종수정 2013-11-25 06:27




(서울=연합뉴스) 홍정규 김승욱 기자









올해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작년보다 상승하지만 사실은 7년째 제자리걸음인 것과 다름없다.

2007년 2만달러로 올라선 1인당 GNI는 올해 2만4천44달러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이 2만달러(1987년)에서 3만달러(1992년)로, 3만달러에서 4만달러(1995년)로 도약하는 데 각각 불과 5년, 3년 걸린 것과 큰 차이가 난다.

특히 1인당 국민소득 상승에도 서민의 살림살이는 오히려 악화했다. 낮은 출산율과 빠른 고령화 등은 앞으로 소득 향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올해 1인당 GNI 2만4천弗 예상…작년比 5.9%↑






25일 금융권에 따르면 올해 1인당 GNI는 2만4천44달러로, 작년(2만2천700달러·세계 49위)보다 5.9%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2.8%, 원·달러 환율을 달러당 1,095원, 인구를 5천22만명 등으로 추산해 나온 수치다.

1인당 GNI는 2007년 처음으로 2만달러를 돌파(2만1천632달러)했지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2만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이후 2010년 2만562달러로 다시 2만달러대로 올라섰고 2011년 2만2천451달러, 작년 2만2천700달러를 기록했다.

올해 1인당 GNI가 비교적 큰 폭으로 늘어나는 것은 경기가 회복될 기미를 보이는데다 원화 가치가 절상됐기 대문이다.

정부도 한국의 경제상황이 회복기에 접어들었다고 진단하고 연간 경제 성장률이 당초 기대를 넘어 3%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했다.

2011년 달러당 평균 1,108원이었던 환율은

지난해 1,127원으로 올랐지만,

올해는 평균 1,090원대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22일 종가는 달러당 1,060.2원이다.

국내 주요 연구기관들은 원화 가치 상승이 계속돼 내년 원·달러 환율이 평균 1,055∼1,074원을 나타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LG경제연구원은 환율 하락 등으로 내년 1인당 GNI는 2만6천달러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 3만弗 언제 가능할까…"경제구조 고도화하고 건전성 유지해야"






지난해 기준으로 소득이 4만달러 이상인 국가 중 인구가 1천만명 이상인 나라는 9개국이다.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캐나다, 호주, 네덜란드, 벨기에, 스웨덴 등이다.

이들 국가는 2만달러에서 3만달러로, 3만달러에서 4만달러로 올라서는 데 각각 평균 9.6년, 5.6년 걸렸다.

한국은 언제쯤 3만달러 달성이 가능할까.

현대경제연구원은

낙관적으로는 한국이 2017년에 3만달러 2021년에 4만달러를,

비관적으로는 각각 2020년, 2032년에 달성할 것으로

예상했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는 앞으로 인구, 물가, 실질성장, 환율 등을 감안하면 한국이 2016년이나 2017년에 3만달러를 달성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김동열 현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내외수가 선순환을 이루고 경제구조 고도화, 생산성 향상 등을 통해 잠재성장률이 4%대를 기록하면 2017년에 3만달러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대식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연구원은 "한국은 재정 건전성, 경상수지가 우수하며 고용률, 투명성지수, 서비스업 발전 부문도 전반적으로 개선 흐름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합계출산율이 1.2명, 투명성 지수가 5.5에 불과하고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인구가 고령화하는 것 등은 소득 향상에 악재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경제연구원은 3만달러에서 4만달러로 도약한 선진 9개국과 3만달러 달성 뒤 성장이 정체되고 있는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의 사례를 비교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인적 자본 확충과 경제구조 고도화를 통해 잠재성장률을 4%대로 유지하고, 복지확대 추세 속에서도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는 것 등을 과제로 제시했다.






◇"1인당 소득 상승이 국민 생활수준 향상으로 이어져야"






1인당 GNI 증가는 말 그대로 국민 평균적인 것으로 3만달러, 4만달러로 올라서는 것이 모든 국민의 생활수준 향상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빈부격차가 심해져 소득 하위층은 오히려 생활이 더 어려워졌다.

통계청에 따르면 소득 양극화 지표로 쓰이는 '소득 5분위 배율(5분위 가처분소득을 1분위 소득으로 나눈 비율)'은 5.05배로 지난해 4.98배보다 악화했다.

한국 가구의 평균 부채는 5천818만원으로 지난해 조사보다 6.8% 증가했다.

조사에 참여한 전국 2만가구 가운데 소득이 하위 20%인 1분위 저소득 계층의 부채가 특히 많이 늘었다.

1분위 가구의 부채 규모는 지난 3월 말 1천246만원으로 1년 전보다 24.6% 커졌다. 소득 하위 20~40%인 2분위 가구의 부채도 3천330만원으로 16.3% 증가했다.

소득 상위 20%인 5분위 고소득 계층의 부채는 지난해 1억3천723만원에서 올해 1억3천721만원으로 조금 줄었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1인당 GNI 상승이 착시 효과에 그치지 않고 일반 국민의 생활수준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데도 각별히 신경써야 한다"고 말했다.






zheng@yna.co.kr, ksw08@yna.co.kr







http://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001&aid=0006614233&date=20131125&type=1&rankingSeq=3&rankingSectionId=101

한국 임금 수준 - 2009년판 국세통계연보 - 한국근로자 58% 연소득 2천만원 미만

우리나라 근로자 60% '2천만원 미만' 소득

노컷뉴스 원문





기사전송 2010-03-24 15:08





뉴스 기사 [CBS경제부 김학일 기자]







우리나라 근로자의 58% 이상이 아직도 2천만 원 미만의 급여(과세대상근로소득)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4천만 원 미만의 급여를 받는 사람은 전체 근로자의 80%나 됐다.

반면 1억을 초과해 급여를 받는 사람은 1.4%에 불과했다.

국세청이 “2009년판 국세통계 연보”를 알기 쉽게 해설해 24일 배포한 ‘한 눈에 보는 국세통계’에 따르면, 2008면 기준으로 전체 근로자 천 404만 6천명 가운데 과세대상근로소득(총급여)이 2천만 원 이하인 사람은 805만 9723명으로 전체의 58.1%, 2천만 원 초과는 306만 1223명으로 21.79%를 차지했다.











이어 4천만 원 초과는 165만 3934명으로 11.78%, 6천만 원 초과는 73만 620명으로 5.20%, 8천 만원 초과는 25만 7380명으로 1.83%를 차지했다.

반면 1억 원 초과는 17만 776명으로 1.22%, 2억 원 초과는 만 3513명으로 0.10%, 3억 원 초과는 6377명으로 0.05%, 5억 원 초과는 4238 명으로 0.03%로 나타났다.

경기 침체 속 고용불안을 반영해 투잡족도 크게 늘고 있다.

근로소득과 함께 이자소득, 부동산 임대소득, 사업소득 등이 있어 5월 말 종합소득세를 신고한 사람이 69만3천명으로

2006년보다 62.5% 증가했기 때문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근로소득이 있는 종합소득세 신고자가 대폭 늘어난 이유는 고용 불안으로 평생 직장 개념이 사라지면서, PC방, 고시텔, 커피전문점, 제과점 등 부업을 사업을 하는 투잡족이 크게 늘어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여성의 사회 활동은 상대적으로 크게 증가해, 여성 사업자가 어느 새 150만 명을 돌파했다. 2004년 127만 명에 그쳤던 여성 과세사업자는 2007년 149만 7천명에 이어 2008년 기준으로 158만 명을 기록했다.






전체 사업자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37.5%로 주로 음식업, 소매업, 숙박업, 대리ㆍ중개업 등에 집중돼 있다. 종합소득세도 여성 신고자는 2008년 143만8천명으로 2004년(77만1천명)의 2배 정도로 증가했다.

전반적으로 여성들의 결혼이 늦어지고 이에 따라 산모의 출산 연령이 높아지자 연말정산시 다자녀 추가공제를 받는 40대가 104만3천690명으로 30대(62만9천758명)의 2.1배에 달했다.

경기가 어려워도 노인들의 아름다운 기부는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종합소득세 신고자 중 연령별로는 70대 이상 노년층의 1인당 기부금이 630만3천원으로 가장 많은 것으로 집계됐기 때문이다.

70대에 이어 60대는 1인당 기부금이 375만6천원, 50대 282만2천원, 40대 234만5천원, 30대 171만6천원, 20대 이하 97만4천원 등이었다.

이날 배포된 '한 눈에 보는 국세통계’는 국세청 홈페이지(www.nts.go.kr)내 국세정보란을 통해 볼 수 있다.







khi@cbs.co.kr











http://news.nate.com/view/20100324n13947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426460


한국 임금 수준 - 2010년판 국세통계연보 - 한국근로자 38% 월소득 100만원 이하

근로소득자 10명 중 4명이 월급 100만원 이하


이명박 정권이 만들어낸 '88만원'세대 급증



서울의소리
ㅣ 기사입력
2010/12/20 [18:55]


기사입력: 2010/12/20






http://www.amn.kr/sub_read.html?uid=2740






이명박 정부들어 근로소득자 10명 중 4명이 월급 100만원 이하인 것으로 조사되어 충격을 주고 있다. 특히 10명 중 3명은 연봉이 1,000만원에 불과해 이명박 정권이 만들어낸 '88만원'세대에 속했다.


































20일 국세청은 '2010년판 국세통계 연보'를 발간했다. 이번 통계연보에서는 소득보다 각종 공제액이 커서 근로 소득세를 내지 않는 저소득 근로자층인 '근로소득세 과세미달자가 40%에 달했으며, 전체 근로자 1,429만4,993명중 575만명이 세금을 안 내도 되는 저소득 근로자인 것으로 집계 됐다.

서민들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간접세 항목인 부가세 징수액이 급증하면서 2007년 26.7%에서 2010년 30,4%로 증가해서 부자감세가 서민들의 고통으로 나타났다.

고소득자와 저소득자의 급여액은 극과 극이었다. 전체 근로자 중 약 541만명인 37.8%가 연급여 1,200만원 이하 소득을 기록했다. 전체 중 31.6%인 451만4,000명은 연봉이 1,000만원 이하였다. 또 연봉이 3,000만원 이하인 근로자는 69.3%로 10명 중 7명으로 연봉 4,500만원 이하는 91.4%로 10명 중 9명으로 나타났다.

반면 1억원 이상 고소득 근로소득자는 총 19만7,000명(1.4%)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년의 19만5,000명에 비해 소폭 증가한 수치다.

특히 연봉별 소득액도 크게 차이가 났다. 1억원 초과 연봉자의 경우 1.4%에 불과하지만 총 32조원이 넘는 근로소득을 기록, 전체 소득 369조6,000억원의 8.7%에 해당했다. 연봉 4,500만원 이상 근로자는 약 10%에 불과했지만 이들이 받는 급여는 50%가 넘어서 근로소득 양극화 현상이 극에 달했음을 나타냈다.

부가가치세가 급증하며 간접세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점이 확인됐다. 2009년 귀속 부가세는 총 47조원으로 전체 국세의 30.4%에 해당했다. 부가세 비중은 2007년 26.7%, 2008년 27.8%에 이어 상승 추세를 기록했다.

반면 법인세는 2008년 39조2000억원에서 35조3,000억원로 소득세는 36조4000억원에서 34조4,000억원으로 나타나 2008년에 이어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는 것은 이명박의 부자 감세가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서울의 소리 http://www.amn.kr/





기사입력: 2010/12/20 [18:55] 최종편집: ⓒ 서울의소리





http://www.amn.kr/sub_read.html?uid=2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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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 결혼 초혼연령 비교

'세계 결혼 연령지도' 보니…한국 '깜깜하네'










뉴스1 원문 기사전송 2013-11-24 18:26





뉴스 기사 (서울=뉴스1) 최동순 기자





프라이스오노믹스 세계결혼연령지도(사이트) News1


세계 각국의 결혼 연령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세계 결혼 연령 지도'가 나왔다.

22일(현지시간) 공개된 이 지도는 미국의 가격비교 블로그 프라이스오노믹스(http://www.priceonomics.com)가 유엔의 '2012 세계 결혼 통계'를 시각화해 자사 사이트에 올린 것이다.

프라이스오노믹스는 "결혼연령이 차이나는 가장 큰 원인은 국가별 임금인 것 같다"면서 "선진국이 결혼을 늦게하는 경향을 보인다" 고 분석했다.

평균 결혼 연령은 북유럽과 서유럽 국가들이 30세 이상으로 만혼 경향을 보였고 아프가니스탄은 20.2세로 가장 일렀다.

지도중 색깔이 짙을 수록 결혼 연령이 높은 지역이다.

이를 보면 한국도 짙은 색으로 표현돼 결혼 연령이 세계에서 만만치 않게 높은 곳으로 나타났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1년도 기준 한국의 평균 결혼(초혼) 연령은 여성이 29.1세 남성이 31.9세다.

반면 퓨 리서치 센터의 조사를 보면 미국의 평균 결혼 연령은 여성이 26.9세 남성이 29.8세으로 우리보다 빨랐다.






http://news.nate.com/view/20131124n15094?mid=n1006

중국 녹색에너지 태양광발전 세계적 수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sid2=322&oid=055&aid=0000266530



미세먼지 고민하는 中, 석탄 대신 녹색에너지 개발


| 기사입력 2013-11-24 21:58





<앵커>

우리에게도 피해를 입히는 중국의 미세먼지는 석탄을 이용한 화력발전이 큰 원인입니다. 이 문제 때문에 중국이 태양광 발전같은 녹색에너지 투자를 대폭 늘리고 있는데, 그 기세가 대단합니다.

베이징 우상욱 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기자>

중국 허베이성에 있는 세계 최대의 태앙광 발전기 제조회사입니다.

옥상은 물론, 연구동 벽면 전체에 태양광 발전판이 설치돼 있습니다.

전동차 주차장 지붕도 태양광 발전판으로 덮었습니다.

전동차로 출근한 직원들은 태양광 발전기로 생산한 전기를 이렇게 무료로 충전할 수 있습니다.

이 호텔은 건물 전면에 태양광 발전판을 달아 최대 30%의 전력을 자체 해결합니다.

농촌에서도 태양광 발전이 각광 받고 있습니다.

전기를 자체조달하는 것은 물론, 쓰고 남는 전기를 전력회사에 팔아 부수입을 얻습니다.

[천춘성/산시성 농민 : 한 달에 1천 300위안(23만 원)쯤 법니다. 1년에 적어도 1만 5천 위안(264만 원)됩니다. 적지 않은 돈인데 그동안 흘려버린 것이죠.]

중국은 태양광 발전량에서 부동의 1위입니다.

세계 10대 기업 가운데 6개가 중국 회사입니다.

초미세먼지 등 환경 문제로 고심하고 있는 중국이 녹색 에너지 개발로 해답을 찾는 것입니다.

[류충위안/잉리 태양에너지사 선전부 : (정부 지원은) 환경보호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기술발전과 가격 인하로 태양광 발전 효율이 높아져 전통 에너지보다 더 싸질 것입니다.]

풍력 발전 용량도 지난해보다 23.6% 늘어난 6천 800만 킬로와트에 달해 세계 1위입니다.

[왕즈시안/중국 전기위원회 비서장 :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발전 효율이 10% 높아졌습니다. 엄청난 발전입니다.]

중국의 재생에너지 발전 비율은 20%를 넘어서 2.3%에 불과한 한국의 9배 가까이 됩니다.

2020년까지 828조 원을 추가로 투자할 계획입니다.

미래 에너지 분야에서 중국이 세계의 주도권을 잡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영상취재 : 이관일)

우상욱 기자 woosu@sbs.co.kr

일본침몰 - 일본은 바다에 가라앉지 않는다



영화처럼 일본은 침몰 않는다
일본 주변 판 가라앉지 않는 저각도 섭입형 … 지구 있는 한 크고 작은 고통은 계속





김원섭 동아사이언스 기자 sboys@donga.com




주간동아 2006.08.22 549 호 (p 64 ~ 65)
















‘정확히 338일 뒤면 일본은 침몰한다.’7월 일본에서는 200억원의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만든 블록버스터 재난영화 ‘일본침몰(日本沈沒)’이 개봉됐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한 획을 그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각본을 쓴 히구치 신지 감독의 감각과 스타워즈 특수효과 팀이 만들어낸 스펙터클한 장면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정말 일본이 가라앉는 게 아닐까’라는 착각을 일으키게 만든다.



‘일본침몰’은 원래 문학가인 고마츠 사쿄가 1973년에 쓴 소설로, 그해에 400만 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다. 같은 해에 영화로도 제작돼 650만 명이 넘는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이며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33년이 지난 지금, 일본은 다시 한 번 깊은 바다 속으로 자신의 땅을 가라앉히려 한다. 일본인들은 왜 이런 일을 하는 걸까. 공포감을 이용한 영화산업의 마케팅인가, 아니면 실제로 다가올지 모르는 재앙에 대한 경고인가.









‘사케가시라’ 심해어 근해에서 발견









지난해 7월 일본 아사히 방송에서는 ‘거대지진은 반드시 온다’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최근 들어 ‘사케가시라’라는 심해어가 근해에서 발견되는 등 이상한 조짐이 보여 지진을 예고한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2005년 3월20일 후쿠오카에서 강도 7.0의 대지진이 발생하기 전 같은 조짐이 있었다. 이에 도호쿠(東北)대학 이마무라 후미히코 교수를 비롯한 일본 지질학 원로들은 조만간 일본에 거대지진이 일어날 거라는 주장을 폈다. 정말 그들의 예상대로 일본에 거대지진이 일어날까. 그리고 일본은 언제까지 지진 공포에 시달려야 하는 것일까.



일본에 지진과 화산이 많이 발생하는 이유는 판 경계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는 거대한 여러 조각의 판으로 돼 있고, 이 판 위에 우리가 밟는 땅덩어리가 놓여 있다. 지구 속 용광로에 있는 맨틀의 대류에 의해 판이 아주 조금씩 움직이는데, 판의 경계면에서는 서로 부딪쳐 안으로 파고들기도 하고 서로 비껴가기도 한다. 지진은 이런 판의 충돌로 인해 생기는 일종의 충격파다.



일본 주변에는 판이 4개나 모여 있다. 일본열도는 크게 유라시아판에 속하는 서남일본과 북아메리카판에 속하는 동북일본으로 나뉜다. 서남일본은 필리핀해판이 비껴서 들어가기 때문에 지층과 지층의 변이가 수평으로 어긋나는 단층이 많다. 반대로 동북일본은 태평양판이 정면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압축력으로 상반(上盤)이 위로 밀려 올라가는 역단층이나 충상단층이 대부분이다. 이들 판은 맨틀의 대류가 끊이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움직이며 서로 힘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결국 일본은 지구가 사라지기 전까지 지진의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



만일 거대지진이 발생한다면 일본열도는 바다 속으로 가라앉을 수도 있을까.



영화 ‘일본침몰’은 지구온난화로 인해 발생한 대량의 박테리아가 태평양판의 움직임을 가속화해 결국 열도 전체가 가라앉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현재 진행 중인 일본 주변 판의 움직임은 구조상 다르다.



현재 태평양판은 일본을 지나 동해 아래로 낮은 각도로 깊숙이 들어가고 있다. 이런 구조를 ‘저각도 섭입(攝入)형’이라 하는데, 그 위에 놓인 지각은 가라앉는 게 아니라 오히려 융기한다. 태평양판의 섭입은 동북일본을 비롯해 동해까지 동서 방향으로 압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각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기 위해서는 마그마 열기둥인 ‘맨틀플룸(mantleplume)’이 형성돼 지각이 늘어나면서 얇아져야 한다. 이런 현상은 주로 해양판이 급한 경사를 이루며 대륙지각 아래로 들어가는 고각도 섭입형에서 생긴다.







생활 깊숙이 담긴 공포 표현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이윤수 박사는 “1700만년 전 유라시아 대륙에 맨틀플룸이 올라오면서 지각이 늘어나 한반도와 한 덩어리를 이루던 일본열도가 분리됐다”고 밝혔다. 이때 분리된 틈으로 바닷물이 들어와 동해가 만들어졌는데, 지각의 일부가 침몰하면서 지금 동해 바닥에 잠겨 있다는 얘기다. 지각 침몰의 예는 가까운 동해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결국 영화에서처럼 동북일본열도가 남북으로 길게 갈라질 수도 없거니와 열도 전체가 침몰한다는 것은 지질학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다.



전 세계 지진망 관측사업을 벌인 미국지질조사소(USGS)는 지구에서 발생하는 지진에너지가 대략 일정하다는 사실을 밝혔다. 지구는 지진을 일으켜 에너지를 방출시키는데, 지구 전체에서 일어나는 지진에너지의 합은 매년 비슷하게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결국 강도가 낮은 지진이 많이 발생할수록 큰 지진이 일어날 확률이 적다는 뜻이다.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을 분석한 결과, 1923년에 일어난 관동대지진 같은 거대지진의 발생주기는 대략 200년으로 예측된다. 또한 서남일본의 지진주기는 100년 정도로 내다보고 있다. 일정한 지구에너지의 분출이니만큼 지진이 어떤 주기를 가지고 발생한다는 것은 통계적, 지질학적으로 충분히 해석 가능한 부분이다.



소설 ‘일본침몰’이 발표된 1973년 당시에는 지진에 대한 불안감이 커져 주가가 폭락하고 실제로 이주민이 늘어나는 등 사회적인 영향력이 대단했다. 그까짓 소설 하나라고 할지 모르지만 세계 지진의 10%가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규모 7.9에 14만3000명이 사망한 1923년 관동대지진과 5500명의 사망자를 낸 1995년 고베지진 같은 악몽은 일본인들의 생활에 깊숙이 자리잡은 공포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일본침몰’은 단순히 화려한 SF 기법으로 치장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 하는 패닉 상태에 빠진 일본 사회를 자세히 그렸다. 해외로 도주하는 갑부들, 국민의 생명을 지키려는 정치인들,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의 사랑.



원작자 고마츠 사쿄가 말하고 싶은 거대지진은 우리의 목을 조여오는 그 무엇일 수 있다. 어려움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존재 가치는 과연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해양판의 섭입 형태






해령에서 만들어진 해양판은 컨베이어벨트처럼 이동하다가 대륙지각 아래로 들어가 소멸한다. 대륙지각으로 들어가는 형태는 저각도 섭입형과 고각도 섭입형으로 나뉜다.





저각도 섭입형

해양판이 대륙지각을 밀어붙이는 형태다. 화산호 뒤편(대륙 쪽)의 지각은 압력을 받아 대륙 침강이 일어날 수 없다. 현재 동북아시아에서 태평양판(해양판)과 유라시아 대륙(대륙지각)의 구조가 이에 속하며 일본열도는 화산호, 동해는 뒤편 지각에 해당한다.

고각도 섭입형

해양판이 급한 경사를 이루며 대륙지각 아래로 들어가는 형태다. 지각이 바깥쪽으로 늘어져 얇아지면서 침몰하기도 한다. 필리핀해판이 유라시아 대륙의 오키나와제도 아래로 들어가는 구조가 이에 속한다. 현재 화산호 뒤쪽으로 새로운 해양분지가 만들어지고 있다.







http://weekly.donga.com/docs/magazine/weekly/2006/08/16/200608160500029/200608160500029_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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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고리’가 지구를 흔들고 있다



최근 칠레 지진까지 강력한 지진 잇달아…4만km에 걸친 환태평양 지진대에서 ‘다발’








기사입력시간 [1064호] 2010.03.10 (수)





김형자 | 과학 칼럼니스트








▲ 2월27일 칠레에서 발생한 규모 8.8의 강진에 의해 갈라진 도로 옆으로 승용차가 달리고 있다.












모두가 잠든 지난 2월27일 새벽, 리히터 규모 8.8의 강진이 밀어닥치며 칠레 전역을 뒤흔들었다. 세계 역사상 일곱 번째로 강력한 지진이었다. 8백명 이상이나 되는 사망자 수를 기록하고 있는 이번 강진 이후에도 규모 6.9를 포함해 여진만 50여 차례 발생하고 있어 시민들을 공포 속에 몰아넣고 있다. 칠레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요즘 지진 사태가 잦다. 최근의 대지진만 해도 일본 고베 지진, 중국 쓰촨 성 지진, 인도네시아의 지진 해일, 아이티 지진 등, 웬일인가 싶을 정도로 대지진들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다. 마치 지진 글로벌화 시대를 방불케 한다. 왜 이렇게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것일까.







▒ 지리적으로 환태평양 지진대에 속한 나라들의 불행


▲ 두 동강 난 건물이 칠레 지진의 악몽을 떠올리게 만든다.
ⓒ연합뉴스






한마디로 답하면 지각 판(Plate)의 움직임 때문이라는 것이 지질학자들의 전반적인 견해이다. 지구 표면은 ‘판’이라고 불리는 12개의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판이 이동해 다른 판과 충돌하면 지각 변동이 발생한다. 지구에서 발생하는 지진이나 화산 폭발의 90% 정도가 이들 판이 만나는 경계 지역에서 발생한다. 각각의 판은 두께가 수십 km에서 2백km까지 이르고, 이들 판은 연간 수 cm 정도씩 움직이고 있다.



지구에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남미 칠레에서 알래스카, 일본, 동남아시아를 하나의 고리로 연결한 길이 약 4만km에 달하는 환태평양 지진대가 분포하고 있다. 일명 ‘불의 고리(the Ring of Fire)’로 불리는 지진 다발 지대이다. 이 지진대는 가장 큰 태평양판 가장자리에 있어 다른 판과 많이 부딪친다. 그래서 이곳에 놓인 나라들에서 지진이 자주 발생한다.



미국지질연구소에 따르면, 최근 50년간 세계적으로 리히터 규모 7 이상의 강진이 5백회쯤 발생했는데, 이 중 15%가 불의 고리에서 일어났다. 쓰나미의 80%도 태평양 지역에서 발생한다. 지진이 잦은 일본 열도의 경우 불의 고리에서 네 개의 지각판이 만나는 위치에 놓여 있다. 서쪽의 유라시아판, 동쪽의 태평양판, 북쪽의 북미판, 남쪽의 필리핀판이 그것이다.



칠레 또한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나라로 유명하다. 약진, 중진이 잦은 것은 물론이고 규모 8 이상의 강진도 연 1회 이상 발생한다. 칠레의 불행도 ‘불의 고리’에 위치한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남북으로 길쭉한 모양의 칠레 국토는 지리적으로 환태평양 지진대의 나스카판과 남아메리카판이 만나는 경계에 자리 잡고 있다. 이번 지진이 발생한 것도 바로 이 두 판의 충돌 때문이었다. 태평양판의 일부인 나스카판이 남아메리카판 아래로 파고들면서 남아메리카판이 솟아오른 것이다. 이런 판과 판이 충돌하면서 칠레에는 지난 1965년에 지진 관측 사상 최대 규모인 9.5의 지진이 발생하기도 했다.







▒ 칠레의 지진에 왜 태평양 연안국들까지 대피령을 내렸을까


▲ 2008년 7월24일 일본 북부를 강타한 지진 여파로 부숴진 하치노에 시 공회당 건물을 건축 관계자들이 꼼꼼히 살피고 있다.
ⓒ연합뉴스






칠레 앞바다에 강한 지진이 발생하자 태평양 연안 국가들 또한 바짝 긴장했다. 지진에 뒤따르는 지진 해일이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태평양쓰나미경보센터(PTWC)는 지난 2월27일 미국·일본·러시아 등 태평양 연안 53개국에 쓰나미 경보를 발령했다. 물론 쓰나미 여파는 러시아까지 이어졌지만 다행히 일본 태평양 연안에서 1.2m, 뉴질랜드에서 1.5m 높이의 지진 해일이 관측되었을 뿐 큰 피해는 없었다. 그렇다면 칠레 한 지역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왜 이렇게 많은 국가가 긴급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진 것일까.



일본 근해나 칠레, 페루 등지에서 일어나는 지진은 큰 해일을 만들기로 유명하다. 지진 해일(쓰나미)은, 지진이나 해저 화산 폭발 등 급격한 지각 변동이 있을 때 발생하는데, 바닷물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 해안까지 밀려든다. 이 쓰나미의 진출 속도는 굉장히 빠르다. 수심이 깊고 먼 바다에서 발생한 쓰나미일 경우 시속 8백km나 된다. 1만8천km나 떨어진 칠레에서 일어난 쓰나미가 하루 만에 우리나라에 와 닿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 칠레 한 나라의 지진으로 태평양 연안국들이 모두 긴장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사례로 1960년 5월, 칠레 발디비아에서 발생한 대지진 이후 22시간 여 만에 1?4m급 쓰나미가 일본 동부 지역을 덮쳐 1백42명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이번 칠레 지진이 발생했을 때 일본이 가장 발 빠르게 대응한 것은 그런 쓰라린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쓰나미가 얼마나 엄청난 규모일지는 실제 파도가 해변에 다다르기 전에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수심이 깊은 바다에서 일어나는 쓰나미의 파도 높이는 몇 cm에 불과하지만 파장 길이는 최대 100km에 달한다. 쓰나미의 또 다른 특성은 해일이 한 차례에 그치지 않고 수십 분 간격으로 여러 차례 도달한다는 점이다. 이는 잔잔한 호수에 물결을 일으켰을 때 물결이 금방 가라앉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우리나라 기상청은 이번 칠레 지진의 위력으로 보아 쓰나미의 속도가 시속 7백km쯤 될 것으로 계산했다. 그리고 26시간 뒤인 2월28일 오후 5?6시쯤 그 쓰나미가 한반도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당초 우려와는 달리 대규모 쓰나미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해안에서 5km 떨어진, 수심이 얕은 곳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수심이 얕은 지역의 지진은 바다로 전달되는 충격이 작아 쓰나미 피해도 줄어들게 된다.







▒ 칠레 지진으로 단축된 하루, 과연 얼마나 짧아졌을까







칠레에서 발생한 리히터 규모 8.8의 지진은 지구의 얼굴을 바꾸고 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 제트추진연구소의 지구물리학자 리처드 그로스 연구원은 “나스카판이 남아메리카판 아래로 파고들어가는 바람에 지구가 ‘조금’ 작아지고 ‘미세하게’ 빨리 도는 결과를 낳았다”라는 이론을 내놓았다. 칠레 대지진의 충격으로 지구 자전축이 약 8㎝ 움직였으며, 이로 인해 하루(24시간)에 한 바퀴 돈다는 지구의 자전 주기가 1.26마이크로 초(약 100만분의 1초) 정도 짧아졌다고 주장했다.



이 수치는 2004년 인도양 쓰나미 때보다 자전축이 더 많이 움직여진 것이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의 쓰나미 때에는 지구의 자전 주기가 3마이크로 초(100만분의 3초)가량 짧아지고, 지구의 자전축이 2.5㎝쯤 기울어졌다. 규모 면에서는 칠레 강진이 인도네시아 강진보다 작지만, 진앙의 위치가 수마트라 때의 적도보다 낮은 위도여서 지구에 미치는 영향이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NASA의 과학자들은 칠레 지진을 일으킨 판의 충돌이 인도네시아 지진 때보다 훨씬 더 깊게 지구를 잘라냈다고 말한다. 칠레판의 융기가 지구 전체 중량을 극적으로 끌어올렸고, 따라서 지구의 자전축을 옮기는 데 훨씬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구 자전축이 변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태양에서 받는 복사 에너지의 양이 지역에 따라 달라지게 되고, 축의 변화 때문에 북극과 남극이 받는 에너지의 양이 많아지게 되면 해수면이 상승할 것이고, 이로 인한 기후 변화도 가능하게 된다는 얘기이다.







▒ 다음 지진 위험 지역은 어디일까







이같은 지각의 뒤틀림으로 지구촌에서 크고 작은 지진들이 많이 일어나자 ‘후속 지진 재난’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아이티 지진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제2의 아이티는 어디가 될 것인가’에 관심이 쏠렸고, 다음 지진 발생지가 어디인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아이티 지진 이후 전문가들은 앞으로 거대 지진이 발생할 가능성이 큰 지역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미국과 캐나다에 걸쳐 있는 태평양 북서부 연안, 일본 도쿄, 인도네시아, 이란 테헤란 등 다섯 곳을 지목했다. 주요 단층선이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한편,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대지진이 발생할 경우에 대규모 피해를 가져올 수 있는 요소인 건물의 안전 수준과 구조 인프라, 인구 밀도 등을 종합해 분석한 결과를 인용해 지진에 가장 취약한 도시 20곳을 소개했다.



국가별로 살펴보면 일본이 세 곳으로 가장 많았고, 터키의 항구 도시 이즈미르, 인도의 델리,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와 반둥, 멕시코의 멕시코시티와 티후아나, 칠레의 산티아고와 안토파가스타, 필리핀의 마닐라, 터키의 이스탄불, 파키스탄의 이슬라마바드, 엘살바도르의 산살바도르, 에콰도르의 과야킬, 우즈베키스탄의 타시켄트 등이다. 대체로 아시아와 중남미 도시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중 칠레 산티아고 서남쪽으로 3백25km 떨어진 태평양 해상에서 이번에 대지진이 발생한 것이다.







▒ 일본의 지진 보호막 역할 덕분에 한반도는 안전할까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지진에 안전할까. 한국은 유라시아판의 내부에 위치해 있어 지진에 비교적 안전하며 쓰나미에도 큰 피해를 입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만일 이번 칠레 지진으로 발생한 쓰나미의 규모가 컸다고 해도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태평양과 한국 사이를 일본 열도가 가로막고 있어 태평양의 쓰나미를 막아주는 한반도의 지진 보호막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반도가 들어 있는 유라시아판은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특히 북상하는 인도·호주판이 동아시아를 더욱 동쪽으로 밀고 있다. 그런데 유라시아판의 동쪽 끝에는 오히려 서쪽으로 이동하는 태평양판이 딱 버티고 있다. 따라서 유라시아판이 받는 힘들은 어디에선가 해소되어야 한다. 그 대표적인 지점이 산둥 반도에서 만주를 가로질러 연해주에 이르는 탄루단층계이다. 결국, 외부에서 유라시아판에 가하는 힘이 일본이나 중국에서 해소되기 때문에 그 가운데 놓인 한반도 지각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상청에서 조사한 한반도 지진 발생 건수는 지난해에만 60건. 1978년 본격적인 지진 관측 이후 최대치이다. 일부 지진학자들은 ‘아무르판 가설’을 내세워 한반도도 지진 위험이 높다고 주장한다. ‘아무르판 가설’은, 한반도를 동서로 관통하는 아무르판이 존재하는데 이 아무르판과 유라시아판의 경계에 한반도가 위치해 두 판이 충돌할 경우 위험하다는 설이다. 이에 대해 “아무르판이라는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들며 경계 또한 불분명해 무리한 설이다”라고 반박하는 지진학자들이 많다.



단, 평균 수심이 100m밖에 되지 않는 남해는 큰 지진 해일이 일어나기 힘들지만, 수심이 2km나 되는 동해는 일본 서쪽에서 일어난 강한 지진의 영향을 직접 받기 쉬워 지진 해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과학자들은 말한다. “지진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은 지구상에 한 곳도 없다”라고. 따라서 우리도 이제 지진에 대해 만반의 대비를 할 때이다.









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51509

삼국시대 한국어 추정

[역사 산책]


잃어버린 고대 한국어 ‘백제어’를 찾아서



계백 장군충청도 사투리 썼다








올 가을 개봉 예정인 코미디 영화 ‘황산벌’에서 극중인물 계백 장군(박중훈 분)이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고 한다.


계백 장군이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할까. ‘황산벌’은 실제 백제어로는 어떻게 발음됐을까. 필자는 잃어버린 고대 한국어인 ‘백제어’를 찾아나섰다. 충청도 부여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 기원전 18년에서 서기 2003년 오늘에 이르기까지, 백제어는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고 있었다.



드라마나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충실하게 전달해야 한다. 필자는 지난해 방영되었던 KBS의 ‘태조 왕건’을 시청하면서 후삼국 통일의 기초를 닦은 황산곡(黃山谷)의 격전 장면이 틀림없이 나오려니 하고 은근히 기다렸다. 태조 왕건 하면 우선 이곳 전투부터 떠오를 정도로 역사적 대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은 유서 깊은 개태사(開泰寺)가 자리잡고 있는 황산곡(黃山谷, 현 충남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天護里)이다. 이곳에서 왕건이 견훤의 아들 신검과 격전 끝에 승리하여 신검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후백제를 멸망시켰다는 사실이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 적혀 있다.



태조 왕건은 승전 기념으로 격전지인 황산곡에 ‘나라를 크게 열다’라는 뜻을 담은 개태사를 창건하였다. 한편 “하늘이 자신을 도왔다”고 여겨 황산(黃山)이라 부르던 승전지의 배산(黃嶺의 북부)을 ‘천호산(天護山)’이라 고쳐 부르게 하였다. 그 후로 오늘날까지 이곳은 ‘천호산’이라 불리며 산 아래 마을은 지금도 ‘천호리’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드라마 ‘태조 왕건’에선 언급되지 않았다.



백제 장군 계백은 왕건보다 300여 년 전의 인물이다. 백제가 멸망할 때(660년) 계백이 전라도 사투리를 썼는 지 여부에 대해선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구체적인 자료가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어와 관계가 있는 그의 출생지와 생활 근거지(주소지)부터 먼저 밝혀야 한다. 그리고 백제어에 관한 이모저모도 종합적으로 밝혀야 그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상하기조차 막연한 아득한 옛날 한반도의 언어, 그 중에서도 특히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백제어를 찾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아닐 수 없다.







백제어와 마한어의 차이







백제(BC 18~AD660년)의 북으로는 고구려·예맥이 있었고, 서남으로는 마한이, 동남으로는 신라가 있었다. 정남으로는 가라가 있었고 현해탄 건너엔 일본이 있었다.



그동안 백제는 마한의 터전에 건국한 나라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엄격히 말해 백제는 고대 한반도 중부 지역에 위치한 ‘위례홀(慰禮忽)’에서 건국하였다. 그래서 ‘위례홀국’이라 부르기도 한다. 백제는 건국 이후 350여 년간 마한과는 별도의 국가로 존재해오다가 백제 중기에 이르러서야 마한을 통합하기 시작하였다. 사학자에 따라서는 마한이 완전 통합된 시기를 문주왕이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때(475년) 이후인 5세기 말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엄연한 사실(史實)을 외면한 것이 백제어가 마한어를 계승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착각을 증명할 정답은 백제의 첫 번째 수도인 ‘위례홀’이라는 이름에 들어 있다. 지명 어미 ‘홀’이 바로 그것이다. 이 ‘홀’은 백제의 태조 온조의 형인 비류가 나라를 세운 곳인 ‘미추홀(彌鄒忽)’에서도 발견된다. 이밖에도 부근 지역의 지명에서 ‘홀’이 많이 발견된다.



이 ‘홀’에 대응하는 지명 어미로 마한 지역에서는 ‘비리(卑離)’가 쓰였다. 이것이 후기 백제어에선 ‘부리(夫里)’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고량부리(古良夫里), 소부리(所夫里) 등이다. 이 ‘부리’는 마한어 ‘비리(卑離)’의 변화형이다. 이 어휘는 신라어와 가라어 지역의 ‘벌(伐)’과 대응된다. 예를 들면 신라어엔 사벌(沙伐), 서라벌(徐羅伐), 비자벌(比自伐) 등이 있었다. 지명 어미 ‘홀’과 ‘비리(또는 부리)’ ‘벌’의 대응 현상은 초기 백제어가 마한어, 신라어, 가야어와는 확연히 달랐다는 것을 증명한다.



백제가 마한을 적극적으로 통합한 시기는 근초고왕(346~375) 때의 일이라고 사학자들은 주장한다. 이 학설에 따른다면 백제와 마한은 적어도 4세기 동안 별도의 국가로 공존해온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백제어는 마한어에서 기원하였다”는 생각은 지워져야 한다. 설령 백제가 건국한 곳이 마한 지역이었다 할지라도 그 북부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짙은 부여계어(語)에서 출발했다고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고대 경기·충청과 호남의 언어 달라







마한어는 현재의 충남·전라도 지역에만 분포해 있었다. 충북을 비롯한 기타 지역에서는 마한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온조 비류 형제가 각각 나라를 세운 곳의 지명에서 마한어의 특징인 ‘비리>부리’는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홀’(위례홀, 미추홀)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일 이들 지명에 붙은 ‘홀’이 고구려 장수왕이 중부지역(황해·경기·충북)을 점령한 서기 475년 이후의 어느 시기에 고구려 식으로 새로 붙인 어미가 아니라면 이것은 분명 백제어의 기원을 증언하는 횃불의 존재이다. 이를 근거로 백제어는 부여계어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많다. 앞에서 제시한 ‘위례홀’과 쌍벽을 이루는 ‘미추홀’의 별명이 ‘매소홀’(買召忽)인바, 이 별칭의 첫글자 ‘매(買)’가 ‘매홀(買忽=水城, 요즘의 수원)’ 등과 같이 ‘수(水)’의 뜻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중부 지역의 남단인 청주의 옛 이름은 ‘살매(薩買)’인데, ‘매(買)’가 어미일 경우에는 강을 뜻하는 ‘천(川)’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동일한 예로 경기도 이천(利川)시의 옛이름은 남천(南川)인데 백제시대엔 남매(南買)라고 했다.



이와 같은 특징은 조수 간만(干滿)의 이름에도 화석처럼 박혀 있다. 예를 들면 한반도 중부지역의 남단인 어청도에선 음력 초하루를 ‘일굽매’라고 부르는데, 남부지역의 북단인 흑산도에선 ‘일곱물’이라고 한다. 열이틀은 어청도에선 ‘세매’, 흑산도에선 ‘서물’이다.



이처럼 ‘매’가 한반도 중부지역에만 분포되었고 마한 지역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백제어는 부여계어를 쓰던 ‘위례홀어’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백제 역사는 공주·부여 시대에 고정되어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이런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백제사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이른바 경기도 ‘한홀’(漢城) 시대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한홀’(현재의 경기도 광주)은 백제 시대 전기·중기(BC 18~AB475년)의 중심이었다.



‘백제 역사=공주·부여시대’라는 착각에 빠지도록 만든 사람은 고려의 김부식이었다.

1145년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지리 1-3 지명에 의거하여 그려진 삼국 판도는

고구려가 남침하여 백제의 북부(황해·경기·강원 영서·충북) 지역을 장악한 장수왕 63년(475년) 이후 시기를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그 이전 백제의 역사가 상당 부분 묵살되었다.



여기서 필자는 ‘삼국사기’가 애써 감춘 사실들을 들추어내고자 한다. 다행스럽게도 ‘삼국사기’의 본기와 열전에 그 단초가 있다. ‘삼국사기’의 기사를 면밀히 검토하면 백제의 전기·중기 시대 한반도 중부지역은 고구려의 영토가 아니었던 사실(史實)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 고구려의 중심부는 졸본과 국내성이었으며 남쪽 경계는 살수(청천강)였다.

따라서 백제의 중기 말(475년) 이전까지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지역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의 내용을 중심으로 백제의 전·중기 판도를 그린 결과 중부지역이 오히려 백제의 소유였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따라서 한반도 중부지역인 황해도, 평안남도 일부,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영서지방 언어는 백제어였음에 틀림없다.

강원도 영동지역은 처음부터 백제와 무관했다.



한반도 중부지역은 고구려가 약 77년간 점령한 이후에 신라의 북진으로 경기 이남과 이북으로 분리된다. 따라서 경기도, 충청도 지역은 겨우 77년간만 고구려의 소유였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 문주왕이 공주로 천도하기 전인 서기 475년까지 중부지역의 토착어는 고구려어가 아닌 백제의 전기·중기어로 봄이 타당하다.



지명은 가장 보수성이 강한 언어다. 경기·충청지방의 지명들이 고구려어도, 마한어도 아닌 백제어(위례홀어)와 뿌리가 닿아 있는 것은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하게 해준다.



잠시 지명의 보수성을 살펴보자. ‘구약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의 고장이었던 ‘바빌론’을 비롯하여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와 ‘우르크’, 아수르왕국의 수도 ‘아수르’ 등의 옛 지명이 50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라크 전역에서 지명으로 쓰이고 있어 얼마 전 이라크전쟁 보도 때 자주 접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도 백인들이 점령하기 이전 인디언 지명과 하와이 원주민의 지명이 그대로 쓰인다.









백제어와 일본어 매우 유사







백제어 중 수를 세는 어휘인 밀(3), 옻(5), 나는(7), 덕(10)은 현재의 일본어에서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대응되는 일본어 어휘인 밋(3), 잇즈(5), 나나(7), 도우(10)와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 전·중기 시대 백제의 선진문화가 일본에 수출된 사실은 자타가 공인한다. 언어는 문화를 담아 나르는 그릇이다. 따라서 자동적으로 백제어도 일본에 동반 수출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를 세는 단어가 주변 국가로 수출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우리와 일본이 일(1), 이(2), 삼(3) 등 중국의 수사체계를 빌려 쓰고 있음이 좋은 본보기이다. 다만 우리는 고유의 수사체계를 아울러 쓰고 있지만 일본은 둘 다 차용하고 있음이 다르다. 이처럼 고대 일본이 백제어의 수사체계를 차용할 정도였으니 다른 어휘의 차용이 어떠했을까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는 백제어가 현대 일본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실증한다.



신라의 수도는 천년간 현재의 경북 경주 일대 서라벌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천도(遷都)로 인한 언어변화를 경험하지 못했다. 고구려는 여러 번 천도를 하였지만 동일한 부여계 언어권 안에서 이동하였기 때문에 언어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제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백제는 ‘위례홀⇒한홀⇒고마(웅진, 현재의 충남 공주)⇒소부리(현재의 충남 부여)’와 같이 언어권이 다른 곳으로 세 번이나 천도하였다.

백제는 서기 660년에 멸망하였다. 나라가 망해도 언어는 상당기간 존속하는데, 백제어는 망국 후 적어도 1세기 남짓은 존속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백제어의 실질적인 존속기간을 약 800년 정도로 추산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신라어가 중앙어를 서라벌에 고정시켜 천년 장수를 누린 것과는 대조적으로 세 차례 천도한 백제는 언어변화의 소용돌이를 겪어야 했다. 편의상 800년 백제어사를 전·중·후기로 구분해 각 시기별로 특징을 요약해본다.



전기 백제어인 ‘위례홀어’는 부여계의 단일 언어였다. 전기 백제사회도 단일 부족국가에 의한 단일 언어사회였다. 이 시기에 쓰인 백제어 지명 어미 ‘홀(忽)’은 성(城)과 같은 의미다. ‘달(達)’은 산(山), ‘단(旦)’은 계곡(谷), ‘매(買)’는 물(水), ‘파혜(波兮)’는 고개(嶺)를 뜻한다. 그런데 한반도 중부 이남에서는 ‘홀’이 ‘비리>부리’로, ‘달’이 ‘뫼’로, ‘단’이 ‘실(實)’로, ‘매’가 ‘믈(勿)’로, ‘파혜’가 ‘고개(古介)’로 달리 쓰였다. 고대 호남지방 언어인 ‘바달(波旦-현대의 바다)’에 해당하는 전기 백제어는 ‘나미’로 서로 달랐다. 바다를 뜻하는 현대 일본어는 ‘우미’다.



전기 백제어의 수사 체계는 독특했다. 백제 지명에서 ‘밀’(密=3), ‘옻’(于次=5), ‘나는’(難隱=7), ‘덕’(德=10)과 같이 기본수 네 개가 발견된다. 이 수사들은 ‘셋, 다섯, 일곱, 열’이라는 현대 한국어 단어와는 전혀 뿌리가 다르다. 앞서 언급했듯 오히려 일본어와 연결된다. 백제가 한반도 내의 전기 영토를 상실한 것처럼 전기 백제어의 상당부분이 한반도에선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어·신라어에 비해 백제어는 중기에 이르러 상당히 다르게 형성됐다. 일반적으로 정치단위가 하나라고 해서 언어적인 면에서도 단일한 것은 아니다. 한 국가 안에 여러 언어가 사용되는 일은 흔하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모두 국어로 쓰는 스위스가 대표적인 예다. 비슷한 사례를 중기 백제어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백제는 중기에 남북으로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언어사회의 구조까지 바꾸었다. 이 시기에 백제는 남부와 북부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복수 언어사회를 형성했다. 말하자면 전기 시대 부여계 단일 언어사회에서 마한어를 공용하는 복수 언어사회로 바뀐 것이다.



백제 사람들은 왕을 ‘어라하’ 또는 ‘건길지’라 일컫고 왕비를 ‘어륙’이라 불렀다. 그런데 ‘어라하’와 ‘어륙’은 지배층인 귀족들이 사용한 언어였다. 반면 ‘건길지’는 평민들이 사용한 호칭이었다. 여기서 지배층의 언어가 부여계어이고 피지배층의 언어가 마한어임을 알 수 있다.



마한어의 특징은 지명 어미 ‘비리’에서 나타난다. 마한 54개국의 이름 중 ‘점비리’ ‘내비리’ 등 비리로 끝나는 이름이 여덟 번이나 나온다. 그런데 이 ‘비리’는 후기 백제어에 ‘부리’(夫里)로 계승된다. ‘고량부리’는 오늘날의 청양이고, ‘소부리’는 부여다. ‘모량부리’는 전남 고창이고, ‘인부리’는 능성이다. 부리가 사용된 지명은 무려 열 번이나 나타난다.



후기 백제어는 두 번째 옮긴 도읍지 공주 시대로부터 막이 오른다.

이 시기 백제는 영토의 상반신을 상실했다.

그러나 왕족 및 귀족은 여전히 부여계어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어는 이 후기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비록 백제사 668년 중 185년에 불과하지만 이 시기의 문화는 백제 문화를 대표할 만큼 찬란하다. 언어는 곧 문화발전의 매개체이기 때문에 발달한 문화는 언어의 발달을 수반한다.



특히 성왕 때 ‘소부리’로 천도한 이후 122년간 눈부시게 발전하는데 이는 곧 언어의 발달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처럼 찬란한 문화를 기록한 문헌이 전해졌더라면 백제 말기 언어의 참모습을 알 수 있으련만 안타깝게도 그런 자료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문장 수준의 자료는 아니지만 지명·인명·관직명 등의 단어들이 전·중기의 것들만큼이나 이 시기에도 남겨졌다.







백제어 억압한 통일신라







나라가 멸망한 후 백제어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수도가 함락된 뒤 백제 유민들은 부흥 운동을 벌였다. 거의 100여 년이나 끈질기게 지속하였으니 그 저항정신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의 저항정신 속에 언어도 함께 살아 숨쉬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일제 36년간의 식민지 시대에 소중한 우리말을 빼앗긴 적이 있다.

이후에 한국어는 되살아났지만, 백제어는 백제 멸망 100여 년 뒤 소멸되고 만다.

통일신라의 경덕왕은 언어 통일을 위하여 전국의 고을 이름을 한자(漢字) 지명으로 개정했다.

신라 정부에 의한 지속적인 ‘백제어 억압 정책’은 백제어의 소멸을 앞당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반해 외세에 의해 언어탄압을 받지 않은 일본의 언어에 고대 백제어의 잔재가 매우 많이 남아 있어 주목을 끈다.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도 백제어가 많이 남아 있다.

일본 역사 자료를 토대로 후기 백제어 단어들을 정밀 분석해보자.





● 고마 : 공주의 옛 이름을 한자로 웅진(熊津)이라 적고 ‘고마’라 불렀다. 이 이름이 ‘용비어천가’(1445)에 나오고 ‘일본서기’(720)에는 ‘구마나리(久麻那利)’로 나온다. ‘고마’는 ‘북쪽’이란 뜻이고 ‘나리’는 현대 한국어 ‘나루’로 변하였다.





● 소부리 : 소부리(所夫里)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 이름이다. 백제가 망한 뒤에도 ‘소부리주>소부리군’으로 쓰이다가 신라 경덕왕이 서기 757년 지금의 부여로 고쳤다. 백제 성왕은 천도하면서 백제의 뿌리가 북부여(北扶餘)임을 강조하는 뜻에서 ‘남에 있는 부여’란 의미로 국명을 ‘남부여(南扶餘)’라 고쳤다. 경덕왕은 남부여에서 ‘부여’만 따다가 소부리를 부여로 바꾼 것이다. 현재도 부소산 기슭 마을은 ‘소부리’라고 불린다. ‘소’는 ‘동쪽’이란 뜻(샛바람의 새)이고, ‘부리’는 ‘벌판’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소부리’는 ‘동쪽 벌판’이란 뜻이 된다.



이 말은 경북 상주(尙州)의 옛 이름인 ‘사벌국(沙伐國)’의 ‘사벌’과 같은 말이고, 신라의 서울 ‘셔벌(徐伐)’과 같은 말이다. 이 말이 변해서 오늘의 ‘서울’이 되었다. 그런데 어형 변화 과정으로 따져볼 때 ‘고마’가 줄어 ‘곰’이 되었듯이 ‘부리’가 줄어 ‘벌’이 된 것이니 ‘소부리’가 ‘사벌’ 또는 ‘셔벌’보다 이른 시기에 발생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따라서 현대 한국어 ‘서울’의 본 뿌리는 ‘소부리’이다.







‘님’의 기원은 백제어 ‘니리므’







● 구드래나루: 고지도에 한자로 ‘龜巖津’(구돌나루)이라 적혀 있다. 소부리에서 은산 및 정산(定山) 방향으로 건너가는 나루를 ‘구드래나루’라 부른다. 백제 시대에는 이곳이 나루라기보다 항구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본 사신의 배들이 군산포(白江口)를 거쳐 강을 따라 올라와 입항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국빈을 맞는 항구였다면 ‘구드래나루’는 그에 알맞은 뜻이 담겨 있어야 한다. 일본인들은 예로부터 백제를 ‘구다라’로 불렀다. ‘구드래’와 ‘구다라’는 비슷하다. 따라서 동일어로 믿을 수 있다. ‘구드래’는 ‘굳+으래’로 분석할 수 있다. 백제어는 유기음이 없기 때문에 ‘大’를 ‘근’(>큰)이라 하였다. 따라서 ‘굳+으래’는 다시 ‘그우+ㄷ+으래’로 분석할 수 있다. 결국 ‘그우>구’(大)로 변한 것이고 ‘ㄷ’은 사잇소리이다. ‘으래’는 전기 백제어로 왕을 일컫던 ‘어라+하’의 ‘어라’에 해당한다.



‘어라’는 지금까지도 즐겨 불리는 민요의 마지막 대목인 ‘어라 만수’(왕이시여 만수 무강하소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구드래’의 본말은 ‘근어라’이며 ‘대왕(大王)’이란 뜻이다. 따라서 ‘굳어라’가 일본어로는 ‘구더라’ ‘구다라’로 변하였고, 우리말로는 ‘구드래’로 변한 것이다. 이 말은 ‘근어라(大王津)’란 뜻이다. 백제의 선진 문화가 후진 일본 문화의 밑거름이었던 사실을 감안할 때 일본인들이 백제국을 ‘구다라나라(대왕국)’로 높여 불러온 겸손을 이해할 수 있다.





● 부소산 : 부소산(扶蘇山)은 백제어로 ‘부소모이’였다. ‘부소’는 ‘솔’(松)의 뜻이다. 부여계어로 ‘부소’ ‘부·’는 ‘솔’을 뜻하는데, ‘솔’은 마한어였다. 전기 백제어 지역에서 이 ‘부소’가 많이 발견된다. 한 예로 ‘부소압(扶蘇押=松嶽=松都)’을 들 수 있다. 백제 시조 온조가 위례홀에 도착하여 먼저 오른 산이 ‘부아악’(負兒岳=三角山)이었다. 그런데 兒의 고음이 ‘·’이었으니 부아(負兒)는 당시의 백제어 ‘부·’를 적은 것이다. 이 ‘부·’도 솔을 뜻한다. 마한어 ‘솔’ 지역에 부여계어 ‘부사’가 침투한 것이다.





● 니리므 : 전기 백제어로 왕을 부를 때 지배층은 ‘어라하’라 하고, 백성은 ‘건길지’라 불렀다. 그러나 후기 백제어로는 왕을 ‘니리므’라 불렀다. ‘일본서기’는 백제 근초고왕에 대하여 “백제 사람들은 왕을 ‘니리므’라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후기 백제어로는 왕을 ‘니리므’라 불렀음이 분명하다. 백제어 ‘니리므’가 말모음 ‘ㅡ’와 자음 ‘ㄹ’을 잃고 ‘니임’으로 변한 뒤에 다시 줄어들어 현대 한국어의 ‘님’이 됐다. 이처럼 현대어 ‘님’은 후기 백제어에서 온 것이다.





나라 잃은 언어는 결국 쇠퇴하여 한 지역의 방언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백제어도 마찬가지 전철을 밟았다. 그렇다면 백제어를 계승한 방언은 지금 어느 지방의 방언일까. ‘표준 백제어’를 계승한 현대어는 바로 공주·부여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쓰이는 방언으로 추정된다(충남 공주 부여 논산 서천 보령과 전북 익산 방언).



요약 정리하면 이렇다.

백제어는 부여계어의 단일 언어로 출발했다.

그러다 중기에 이르러 호남지역으로까지 영토가 넓어지자 호남지방에서 주로 쓰이던 마한어까지 공용하는 복수 언어사회를 이루었다.

후기에 들어선 부여계어와 마한어가 혼용되어 단일 언어사회에 가깝게 됐다.



그러나 백제 후기에도 왕족과 귀족은 국호를 백제에서 남부여로 개명할 정도로 부여계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 상류층은 여전히 부여어계 백제어를 구사했다.

마한어를 토대로 부여계어가 혼합된 형태의 백제어는 주로 피지배층이 사용했다.



즉 상류층은 백제 멸망 때까지도 경기도 광주를 중심으로 형성된 부여어계 언어를 계승, 사용한 것이다.

이들 상류층의 언어는 후기 백제의 수도, 즉 공주-부여를 중심으로 ‘수도권 백제 표준어’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의 호남 방언은 마한어에서 주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충남 공주-부여 방언은 호남 방언과 언어학적 특징에서 뚜렷이 구분된다. 따라서 충남 공주-부여 방언이 후기 백제의 수도권 표준어를 바탕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계백 장군은 제2품(달솔)의 고관, 즉 상류층 귀족계급으로 백제의 수도인 부여에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계백장군은 수도에 거주하는 백제 상류층이 사용한 언어, 즉 백제 표준어를 구사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영화에서 계백 장군이 굳이 현대 한국어 방언을 사용하는 것으로 설정한다면, 호남 사투리가 아닌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것이 더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



다만 부여어계와 마한어가 백제의 영토 내에서 혼합되었으며 이로 인해

현재의 호남 방언도 수도권 백제 표준어의 특징들을 상당부분 이어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산벌 전투를 백제 표준어로 표현하면 ‘누르리모이부리(黃等也山夫里)’ 전투다. 누르리모이부리에서 산화한 패장 계백은 어떤 인물일까. 이 물음에 자세히 대답하기는 어렵다. 그나마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는 문헌은 ‘삼국사기’열전의 기록뿐이다.



이 전투에서 맞서 싸운 신라 장군 김유신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열전 10권 중 3권에 나누어 자세히 기술하였으나 계백은 열전 제7의 13인 중 맨 끝에 소개하였는데 그나마 짤막하기 그지없다. 오히려 계백이 생포했다가 돌려보낸 화랑 관창에 관한 내용이 배나 길다. 승자에 비해 패자의 모습은 이렇듯 초라하다.



‘삼국사기’는 김유신의 생지(生地)와 가계를 확실히 밝히며 서울(서라벌) 사람이라고 소개하였다. 그러나 계백은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에서 살았는지 밝히지 않았다. 다만 그가 백제 사람이라는 것과 벼슬길에 나아가 달솔이 되었다고 적었을 뿐이다.



그의 이름은 階伯, 텏伯으로 표기되어 있다. ‘계’를 동음이자로 표기한 것을 보면 한자의 뜻과는 관계없이 이름을 적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성씨는 기록하지 않았다. 같은 시기의 백제 인물들이 ‘장군 允充(윤충) 殷相(은상), 좌평 成忠(성충) 義直(의직) 興首(흥수) 忠常(충상) 常永(상영), 달솔 自簡(자간) 助服(조복)’ 등과 같이 성씨 없이 이름만 나타난 것과 비슷하다. ‘삼국사기’엔 신라왕은 박·석·김(朴·昔·金) 3성으로 불렀지만 백제왕은 성씨 없이 온조, 다루, 기루, 개루 등과 같이 이름만 적혀 있다. 백제에서는 왕처럼 백성들도 이름만 불렀을 것이다.







백제인은 두 자 성씨, 두 자 이름







계백의 의미는 무엇인가. 위에 열거한 다른 이름들에 대한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처럼 계백의 의미도 알 수 없다. 신라 왕명 중에서 시조 혁거세(赫居世)는 ‘밝아누리’, 유리(儒理)는 ‘누리’, 소지(昭知)는 ‘비지(毗處)’라는 신라말로 풀이할 수 있다. 백성 이름도 황종(荒宗)을 ‘거칠부(居漆夫)’, 태종(苔宗)을 ‘이사부(異斯夫)’, 염독(厭獨)을 ‘이차돈(異次頓)’이라 불렀기에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인의 이름은 신라처럼 한자어로 표기한 별명이 없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백제 왕명 중에 의미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경우는 무령왕뿐이다. 무령왕은 부모(왕과 비)가 국빈으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는 중에 왕비가 일본 규슈(九州)의 북쪽 한 섬에서 해산하였다. 무령왕은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름을 ‘세마(斯麻=嶼)’라 불렀다고 ‘일본서기’에는 비교적 자세히 적혀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사마(斯摩)로 적혀 있고,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지석(誌石)에도 사마(斯麻)로 적혀 있어 믿을 수 있다.



또 다른 근거는 백제어 ‘세마’ 또는 ‘사마’에서 기원하여 ‘섬(島)’이라는 현대 한국어가 나왔다는 사실이다.



‘고마(熊)’가 변하여 ‘곰’이 된 것처럼 끝 모음을 잃고 단음절로 줄었다. 백제는 왕성이 ‘부여(扶餘)’씨이고 백제 멸망 후 백제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장수 은솔(西部恩率) 귀실복신(鬼室福信), 별부장(別部將) 사탁상여(沙度相如), 흑치상지(黑齒常之)의 경우 귀실, 사탁, 흑치는 성씨이며 복신, 상여, 상지는 이름이다. 역사서에 이들의 성명이 ‘복신, 상여, 상지’로만 빈번히 기록된 것을 보면 생략된 앞부분은 성씨였음이 분명하다. 이들의 성씨가 두 자인 점도 특기할 만하다.



이로 미루어 생각할 때 계백은 성명이 아니라 오로지 이름일 뿐이며 그도 두 자로 된 별도의 성씨를 갖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현대 한국인은 한 자로 된 성씨와 두 자로 된 이름을 쓰고 있다. 반면 현대 일본인은 계백 등 고대 백제인과 마찬가지로 두 자로 된 성씨와 두 자로 된 이름을 쓰고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계백 장군의 고향은 어디일까. 그가 거주하였던 곳은 어디였을까.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계백의 출생지와 거주지가 어느 문헌에도 적혀 있지 않기 때문에 확실히 알 길이 없다. 다만 여러 모로 탐색하여 짐작할 뿐이다. 역사서는 귀실복신을 서부 달솔이라 지칭하였으니 그가 서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의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계백도 예외가 아니다. 계백의 벼슬이 달솔이었으니 품계로 따지면 제1품인 좌평(佐平) 다음가는 높은 자리이다. 이러한 그의 벼슬로 미뤄보아 백제의 서울 소부리(사비) 사람임에 틀림없을 듯하다. 더구나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러 왕이 그를 구국의 선봉장으로 삼았다면 그가 도성에서 멀리 떨어져 살지 않았을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누르리모이부리 전투’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황산벌(黃山之野)은 어디였을까. 황산(黃山)은 고려 태조 때 연산(連山)으로 개명되었다(940년). 백제 시대에는 황등야산(黃等也山)으로 불렸는데 신라 경덕왕이 황산으로 개명한 것이다(757). 따라서 서기 757년까지는 ‘황등야산’으로 불렸다. 앞서 언급했듯 백제인들은 ‘黃等也山’을 ‘누르리모이’라 불렀다. 따라서 황산벌전투가 끝난 후 한동안은 ‘누르 리모이부리 싸움’이라 불렸을 것이다. 거의 100년 뒤인 서기 757년에 중국식 두 글자 지명인 ‘黃山’으로 개정된 뒤부터 백제식 이름은 점점 약해져 결국 사라지게 되었다.



이곳의 지형은 치소(治所)를 중심으로 동부에 올망졸망한 산봉우리가 북으로부터 남으로 36개나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백제인들은 이렇게 ‘산이 늘어섰다’는 의미로 ‘누르리모이’라 명명한 것이다.



한자 黃, 等은 음을 따온 것이다. 그런데 신라 경덕왕이 ‘黃等也山’에서 ‘等也’ 두 자를 줄여 ‘누르모이(黃山)’가 됐다. ‘누르’는 곧 ‘느르(連)’와 동음이어다. 그리하여 고려 초기에 ‘느르모이(黃山)’는 ‘連山’으로 다시 한역되어 현재까지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황산벌 싸움터’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누르기재’(黃嶺), 누르기(마을), 누락골(於谷里 또는 於羅洞), 누르미(마을), 황산리(新良里 동쪽) 등의 지명이 파생되었다.



이들 여러 지명 중에 어느 곳이 당시의 결전장이었을까. 본래 싸움터란 일정한 곳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싸우다가 다른 장소로 밀려가기도 하기 때문에 어느 한 곳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 그래도 굳이 지정한다면 ‘누르미, 누르기, 황산리’ 일원이 아닐까. 전해 내려오는 ‘황산벌 싸움’의 지명 ‘黃山, 누르모이’와 같기 때문이다. 상당히 넓은 이 벌판은 계백 장군의 지휘사령부에서 약 10여 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계백 장군이 5000명의 결사대를 지휘하던 사령부는 황산성(黃山城)에 위치해 있었다. 누르모이 싸움의 요새였던 이 성의 둘레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493보(步)이고 성 안에 샘이 하나 있었는데 일년 내내 마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필자는 소년 시절 황산성에 있었다는 이 샘에 자주 놀러 갔었는데 수량이 많고 깨끗해서 물맛이 아주 좋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황산벌 성터는 남저북고(南低北高)의 지형을 갖추고 있어 북쪽은 성을 쌓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높았다. 아래로 내려다보면 멀리서 움직이는 적군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위치로 서쪽으로는 백제의 서울 소부리(사비성)가 아련히 보인다. 이 성터 지휘대에 올라서서 구름처럼 몰려든 신라군과 맞서 싸우며 계백장군은 한두 번쯤 서울 소부리를 바라보지 않았을까. 한반도 서부와 일본을 호령하던 ‘700년 제국’ 백제의 멸망을 예감하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계백 장군은 백제 수도인 현재의 충남 부여지역에 거주하면서 수도권 표준어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여에 있는 백제 별궁의 연못 궁남지.











논산시 관동은 화랑 관창에서 유래







현재 논산시 연산면 북쪽 3리 황산성(일명 城隍山石城)의 동쪽 산자락에는 관동(官洞)이라는 산골이 있다. 이 산골의 이름은 신라 화랑 관창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삼국사기’ 열전 제7에 화랑 관창(官昌 또는 官狀) 이야기가 나온다. 관창은 신라 장군 품일(品日)의 아들이다. 백제를 침공할 당시 관창은 부장(副將)이었다. 신라 군사가 느르뫼벌에 이르러 백제군을 네 차례 공격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그러자 품일 장군이 아들 관창에게 홀로 백제군에 진격하여 용맹을 떨치라고 명하였다. 명을 받은 관창은 말에 올라 창을 비껴 들고 적진으로 돌격하여 백제군을 여러 명 죽였다. 그러다 사로잡혀 백제 원수 계백 앞에 끌려갔다. 계백 장군이 관창의 갑옷을 벗기게 하였다. 아직 나이 어린 소년이었다. 계백은 어린 소년의 용감함을 어여삐 여겨 차마 죽이지 못하고 탄식하기를 “신라에는 기특한 선비가 많다. 소년도 오히려 이러하거늘 하물며 장사는 어떠하랴” 하며 살려보냈다.



그러나 관창은 “내가 아까 적진에 돌격하여 장수의 목을 베고 영기(營旗)를 꺾지 못하였으니 한스럽기 그지없구나. 다시 쳐들어가서 반드시 성공하리라”고 외친 후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신 뒤 재차 적진으로 돌진하여 용맹스럽게 싸웠다. 계백이 그를 사로잡아 이번에는 머리를 베어 말 안장에 매달아 보냈다.



말이 관창의 머리를 안장에 매달고 돌아오자 품일은 아들의 머리를 쳐들고 소매로 피를 닦으며 “내 아들의 얼굴이 살아 있는 것 같구나. 나라를 위하여 전사하였으니 참으로 장하도다”라고 외쳤다. 이를 본 모든 군사가 분개하여 목숨 받쳐 굳게 싸우기로 결의한 다음 북을 치며 진격해 백제군은 크게 패하고 말았다.



화랑 관창이 죽은 곳이 이후 ‘관창골(官昌洞)’로 불렸으며 후대에 ‘창’이 생략되어 ‘관골(官洞)’이 되었다가 현재엔 관동이 됐다는 것이다.



충남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忠谷里) 마을 북쪽 산기슭에 1340여 년 전에 사망한 계백 장군의 묘가 있다. 최후의 결전장에서 직선으로 거의 6km나 떨어져 있는 곳이다. 계백은 비록 패했지만 5000의 군사로 5만 군사와 싸워 네 번을 격퇴시킨 충장(忠將)이었다. 그가 전사한 후 어떻게 여기에 묻히게 되었는지를 전하는 기록은 없다. 아마도 전사한 장군을 누군가 남몰래 이곳으로 옮겨 비밀리에 묻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르리모이부리 싸움에서 이곳 부근에까지 밀려와 끝까지 저항하다가 결국 이곳 충곡리에서 전사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곳은 백제 서울 소부리 쪽으로 후퇴하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백제 충신 계백의 무덤이라는 전설로 인하여 이곳은 지금도 충곡(忠谷)이라고 불린다. 지명이 지닌 역사적인 증거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이 묘가 가짜일 수도 있다 하여 의심해왔다. 의심을 풀기 위하여 1966년 여름 실제로 묘를 파 보았는데 증거물은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묘는 계백 장군의 묘일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우선 묘 속의 길이가 12척이요, 넓이가 6척이나 되며 석회로 천장을 다섯 층이나다진 것 등은 상고(上古)시대의 무덤 규모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충곡이라는 지명이 가장 확실한 물증이다. 조선 영조 18년(1692년)엔 충곡서원이 창건되어 계백 장군을 배향(配享)하였다.



최근 논산시가 계백 장군 묘의 봉분을 장군 묘답게 키우고 묘역도 넓혔다. 묘소에 충혼비도 세웠다. 아울러 부근에 계백 장군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앞의 넓은 광장에 기념관을 건립하는 등 기념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5000 결사대 최후의 순간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계백의 벼슬은 달솔이었다. ‘달’은 백제어로 ‘높다(高)’는 뜻이다. 또한 ‘달’은 ‘아사달(阿斯達=九月山)’, ‘부사달(夫斯達=松山)’, ‘소물달(所勿達=僧山)’ 등과 같이 산(山)의 뜻으로도 쓰였다. 달솔(達率)은 대솔(大率)로 다르게 적기도 하였다.



고유어 ‘한’을 한역하면 ‘大’이다. 대전(大田)을 ‘한밭’, 대천(大川)을 ‘한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솔’은 고구려의 벼슬이름 중에서 ‘욕살(褥薩)’의 ‘살’에 해당한다. 이 ‘살’, ‘솔’이 변하여 후대의 ‘슬’이 되었다. ‘벼살’이 ‘벼슬’로 바뀐 것이다.



계백 장군은 장졸 5000 결사대를 이끌고 서울 소부리를 출발하여 ‘두락모이(石城)’를 지나 ‘가디나이(恩津)’를 거쳐 ‘누르리모이(黃等也山)’에 당도했을 것이다. 도착하자 세 진영(三營)을 설치하고 신라군과 맞섰다. 아마도 당시의 세 진영 중 제1영은 현 관동리의 서쪽산 위에 축성한 석성 ‘누르모이잣(黃山城)’이고, 제2영은 이 제1영에서 정남을 향해 왼쪽(남동쪽)에 있는 흙성 ‘누르재잣(黃嶺城)’이며, 제3영은 오른쪽(서남쪽)에 있는 흙성 ‘오이잣(外城)’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령탑인 제1영을 중심으로 양팔을 벌린 듯이 두 진영이 펼쳐 있어 적을 품안에 끌어들여 섬멸할 수 있도록 설치됐다.



계백은 5000 결사대를 작전에 알맞게 3개 진영에 분산 배치하고 주성인 제1진영에 올라 총지휘하여 10배가 넘는 5만여 신라군을 네 차례 격퇴했다. 그러나 싸움이 계속되면서 기진맥진한 백제군은 신라군의 다섯 번째 진격을 맞아 ‘누르리모이부리’ 마지막 싸움에서 마침내 전멸한 것이다.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 계백은 후기 백제의 표준어에 해당하는 ‘고마·소부리’ 말을 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영화 속 계백 장군은 공주·부여 지방 방언을 쓰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都 守 熙

● 1934년 충남 논산 출생
● 충남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 충남대 국어학 박사
● 충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현재 충남대 명예교수
● 저서 : ‘백제어연구’ ‘한국어음운사연구’








글: 도수희 충남대 명예교수·국어학 tohsh@chol.com

발행일: 2003 년 09 월 01 일 (통권 528 호)

쪽수: 584 ~ 598 쪽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3/08/25/200308250500014/200308250500014_8.html